일전에 명량해전에 대해 누락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런저런 역사들

더 하나 이야기하면...

사실 이건에 대해 당시에 명량해전의 결과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볼 필요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그걸 누락했으니 이참에 한번 언급해야 겠습니다. 물론 작년에 이미 다 완결을 내야만 했던 것입니다만.ㄱ-



9월 14일 [양력 10월 24일]<임인> 맑다.
벽파정 맞은편에서 연기가 오르기에 배를 보내어 싣고 오니 바로 임준영이 육지를 정탐하고 와서 말하기를, "적선 이백 여 척 가운데 쉰다섯 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적에게 사로잡혔던 김중걸이 전하는 데, 이 달 6일에 달마산으로 피난갔다가 왜놈에게 붙잡혀 묶여서는 왜선에 실렸습니다. 김해에 사는 이름 모르는 한 사람이 왜장에게 빌어서 묶인 것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 날 밤에 김해 사람이 김중걸의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왜놈들이 모여 의논하는 말이, `조선 수군 열 여 척이 왜선을 추격하여 사살하고 불태웠으므로 할 수 없이 보복해야 하겠다. 극히 통분하다. 각 처의 배를 불러 모아 조선 수군들을 모조리 죽인 뒤에 한강으로 올라 가겠다.'고 하였습니다."는 것 이었다. 이 말은 비록 모두 믿기는 어려우나, 그럴 수도 없지 않으므로,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보내어 피난민들을 타일러 곧 뭍으로 올라 가라고 하였다.


명량해전이 있기 이틀전 난중일기의 기록입니다. 탐망을 맡은 임준영이 왜군에 포로로 잡혔다 풀려난 이에게 들은 내용을 전달한 것인데, 몇가지 사실을 알수 있지요. 

-얼마전 교전(해당 날짜 기준 7일전)에서 이순신의 수군에 패했고 이에 보복하려 한다.
-각지의 배를 집결하여 조선 수군을 제거한다.
-이후 한강으로 올라간다.

넵, 명백한 다음 목적으로 한강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즉 이순신과의 해전에서 왜군이 승리한다면 그 다음 목표는 한강이라는 것이고 이는 서울을 친다는 것입니다. 만일 명량해전이 이순신의 전략적 패배라면 왜군은 그대로 한강까지 갔어야만 했습니다. 즉 조선 조정이 생각하는 최후의 보루인 강화도까지 육박할수 있다는 소리죠. 하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합니다.

이는 조선 조정도 인식하고 있던 것으로,


선조 94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11월 10일(정유) 5번째기사
제독 총병부에 적군의 동태와 대비책, 우리 장수의 전과를 알리게 하다 

제독 총병부(堤督摠兵府)에 이자(移咨)하였다.
“조선 국왕은 왜적의 정세가 긴급한 일로 자문을 보냅니다. 본년 10월 28일에 접수한 흠차 제독 남북 수륙 관병 어왜 총병관 후군 제독 부도독 동지(欽差提督南北水陸官兵禦倭摠兵官後軍提督府都督同知) 마(麻)3941) 의 자문에 ‘흠차 총독 경략 군무 병부 상서(欽差摠督經略軍務兵部尙書) 형(邢)3942) 의 헌패(憲牌)3943) 에 「조선이 한산도(閑山島)의 수비가 무너져 남원성(南原城)이 함락된 뒤부터 해국(該國) 남쪽의 병장(兵將)들은 모두 제각기 산속으로 도피하고, 오직 북쪽으로 평양(平壤) 일대의 군병뿐이다. 」라고 했다.’ 하였습니다.
...
(중략)
...

근래 또 배신 겸 삼도 수군 통제사(兼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치계에 의하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병선과 병기가 거의 다 유실되었다. 신이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 김억추(金億秋) 등과 전선 13척, 초탐선(哨探船)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海南縣) 해로의 요구(要口)를 차단하고 있었는데, 적의 전선 1백 30여 척이 이진포(梨津浦) 앞바다로 들어오기에 신이 수사(水使) 김억추, 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 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 등과 함께 각기 병선을 정돈하여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 앞바다에서 적을 맞아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운바,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깨뜨리니 사살이 매우 많아 적들이 모두 바다속으로 가라 앉았으며, 머리를 벤 것도 8급이나 되었다. 적선 중 큰 배 한 척이 우보(羽葆)3944) 와 홍기(紅旗)를 세우고 청라장(靑羅帳)3945) 을 두르고서 여러 적선을 지휘하여 우리 전선을 에워싸는 것을 녹도 만호(鹿島萬戶) 송여종(宋汝宗)·영등 만호(永登萬戶) 정응두(丁應斗)가 잇따라 와서 힘껏 싸워 또 적선 11척을 깨뜨리자 적이 크게 꺾였고 나머지 적들도 멀리 물러갔는데, 진중(陣中)에 투항해온 왜적이 홍기의 적선을 가리켜 안골포(安骨浦)의 적장 마다시(馬多時)라고 하였다. 노획한 적의 물건은 화문의(畫文衣)·금의(錦衣)·칠함(漆函)·칠목기(漆木器)와 장창(長槍) 두 자루다.’ 하였는데, 이미 절차대로 자보(咨報)하고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지금 앞서의 연유에 따르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부터 남쪽의 수로(水路)에 적선이 종횡하여 충돌이 우려되었으나 현재 소방의 수군이 다행히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봉(賊鋒)이 조금 좌절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유격장 서(徐)가 거느리고 있는 수병이 이미 강화도에 도착하여 충청을 거쳐 전라도 우수영(右水營) 앞바다까지 내려간다고 하는데, 남쪽 바다는 적이 통행하는 해로입니다. 만약 중국의 수군이 기회를 보아 전진한다면, 소방의 수군도 그 성세에 의지해 점차 소집을 하여 한산도 일로(一路)의 수복을 기도하여 적굴의 소탕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다 귀원(貴院) 및 총독 군문이 승전 계획을 세우고 소방 사람들을 고무시켜 스스로 힘써 떨치고 일어나서 죽음 속에서 살 길을 찾도록 하는 데에 달렸습니다. 이에 따른 계획·독촉·소집·훈련 등의 일은 의당 귀자문의 내용에 따라 밤낮으로 각별히 힘써 감히 태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배신 도순찰사 권율이 각 배신들이 거느리고 있는 군병의 현재 수효 및 방어하고 있는 지방과 진영의 장소를 조사, 치계하기를 기다려 재차 갖추 써서 자보(咨報)하겠다는 사유들은 이미 회자(回咨)하였고, 이제 앞서의 연유를 접수하고 자복(咨復)할 연유를 참조하여 갖추 조사하여 자복함이 마땅할 것이기에 이렇게 회자를 하는 것이니, 조험(照驗)하여 전보(轉報)하십시오. 자문을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즉 명량해전에서의 승리로 더이상 왜군이 서해에 진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던 것입니다. 오히려 조선 수군이 강화도에 도착한 명나라 수군과 합세하면 한산도까지의 수복을 기대할수 있다는 내용도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명량해전 이전까지는 강화도를 최후의 보루로 삼아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으니 명량해전 이전과 이후 변화는 확연한 것입니다.


결론:
-왜군의 명량해전 다음 목표는 한강까지의 진출로, 결국 그 목적을 실행하는데 실패함.
-조선 조정은 명량해전에서의 승리로 왜군이 서해에 진입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으며 명나라 수군과 합세하여 반격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함.
-결국 명량해전이 이순신의 전략적 실패라는 주장은 당대 기록도 무시한 무리수.


PS: 
물론 선조는 위 내용에서도 알수 있겠지만 명량해전에서의 승리를 '작은 승리'로 깎아내렸고 명나라 경리인 양호가 이순신에게 명량해전의 승리에 대해 비단을 선물한 것을 불편하게 여깁니다. 물론 양호는 선조와의 접견에서 “이순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다 흩어진 뒤에 전선을 수습하여 패배한 후에 큰 공을 세웠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그 때문에 약간의 은단을 베풀어서 나의 기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라며 오히려 치켜세웠지만 말입니다.

더불어 양호는 명량해전이 있기전 벌어진 직산전투에서 왜군의 북상을 저지했으며 이후 명량해전에서의 패배로 왜군이 더이상 북진하지 않았음을 감안했다고 여겨집니다.

더불어 비단에 관한 것은 난중일기에도 기록됩니다.

11월 16일 [양력 12월 24일]<계묘> 맑다.
아침에 조방장·장흥부사 및 진중에 있는 여러 장수가 아울러 와서 봤다. 군공마련기를 하 나씩 점고했더니 거제현령 안위가 통정대부가 되고, 나머지도 차례차례 벼슬을 받고, 은 스무 냥을 내게로 보냈다. 명나라 장수 경리양호는 붉은 비단 한 필을 보내면서, "배에 이 붉은 비단을 걸어 주고 싶으나, 멀어서 할 수 없다."고 했다. 영의정의 회답편지도 왔다.

PS2:
한가지 더 언급하면 당시 일본 수군은 수상전만 하는 집단이 아닙니다. 즉 일본 수군 병력들은 상륙해서 육상 전력으로도 이용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본 수군이 식량과 무기만 보급하는 역활이 아니라는 것으로 실제로 칠천량 해전 이후 남원성 전투는 일본 수군의 병력도 동원되었습니다. 즉 위에 언급한대로 만일 한강까지 갔다면 단순히 한강 근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상륙을 하여 전투를 벌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덧글

  • aLmin 2015/06/10 07:38 #

    "이렇게 된 이상 한강으로 올라간다!"
  • 누군가의친구 2015/06/11 22:20 #

    하지만...!
  • aLmin 2015/06/10 07:40 #

    아무튼 이걸 보시죠. http://canals.egloos.com/6199040
  • 누군가의친구 2015/06/11 22:21 #

    흔들리지 않잖아!
  • 대한제국 시위대 2015/06/11 01:12 #

    여기서도 하성군 이균의 질투심이 나오는군요. 작은 승리라니;;;;

    조선수군 괴멸됐으면 좆망일 상황인데ㅡㅅㅡ
  • 누군가의친구 2015/06/11 22:21 #

    선조의 저 질투심은 이순신 사후에도 나와서 노량해전 승전보고에 대해서도 과장해서 말한거 아니냐며 해대죠.ㄱ-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에드센스_468_60


유사역사학 사절

당신들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이글루스 시노노메 사츠키 모에단

이글루스 시노노메 사츠키 모에단2

애드센스_128_128

imaimo

『いま妹』 応援バナー frs001bn017

통계 위젯 (화이트)

1527
154
1130493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화이트)

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