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6월 6일은 현충일 입니다.
순국선열분들을 잠시나마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2.
6월 6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던 날이기도 합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당시 가장 치열하던 오마하 해변에서의 상륙을 다루고 있다면,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당시 공중 강습한 공수부대를 다루고 있지요.
디에프 상륙작전에서 크게 패했던 원인을 분석한 끝에 펼쳐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이전과 달리 대대적인 공습과 지원 포격, 공수부대 투하 이후 상륙작전이 벌어졌습니다. 애초에 이 상륙작전을 파 드 칼레로 오인케 하기 위해 가짜 몽고메리라던지, 병사구타사건으로 해임되어 놀고 있는 패튼의 가짜부대등등 벼라별 수단을 동원하여 철저히 기만후 벌어졌고 말입니다.
영국군은 괴팍한 전차만능론자였던 하바트 소장의 개발해낸 퍼니 전차들이 상륙과정에서 크게 활약했지만 미군은 상륙전 경험이 풍부한 미 해병대의 조언등을 무시했고 결과는 오마하 해변에서 고스란이 드러납니다.(...)
한편 크레타 침공당시 독일 공수부대 팔슈름야거의 활약으로 인해 충격을 받고 영국군과 미군은 공수부대의 대대적 창설및 훈련에 여념이 없었지만 독일은 그 사상자 수때문에 히틀러가 더이상의 공중투입을 금지함으로써 그저 엘리트 보병부대마냥 쓰여지고 맙니다.
덕분에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일 미군과 영국군의 공수부대는 여러 난관이 있었지만 후방 교란및 거점 확보등의 역활을 충실히 해냈고 말입니다. 한편 팔슈름야거는 마켓가든 작전에서 공중으로 투입되는 연합군 공수부대와 교전하기도 합니다.(...)
한편 독일은 디에프 상륙작전 이후 연합군이 상륙을 계획하고 있음을 깨닫고 대서양 방벽 구축을 합니다만, 지휘부내에서 상륙장소가 노르망디가 될 것인지 파 드 칼레가 될것인지를 두고 양분된 상태였습니다. 또한 대응 방법에 대해서도 양분된 상태였고 말입니다. 결국 연합군의 기만에 의해 히틀러는 후자를 택했고 또한 대서양 방벽 책임자이던 롬멜은 부인 생일이라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말입니다.(그나마 상륙지점이라던지, 대응방법에 있어서는 비교적 정확했다만.ㄱ-)
어찌 되었든 냉전 당시에는 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전세에 결정적 역활을 했다고 평가되었으나 냉전 종식후에는 그 평가에 대해서는 많이 절하된 상태이죠. 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의 향방에 영향을 준 사건중 하나임은 부정할수는 없습니다.(개인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친걸 뽑자면 쿠르스크 전투를 뽑겠습니다만.)
3.
한편 이 기간에도 하나 다른 중요한 전투가 있던 기간이기도 합니다.
바로 미드웨이 해전이죠.
1941년 12월 6일 진주만 공습이후 승승장구 하던 일본은 1942년 4월 18일 갑작스래 둘리틀 공습을 받았고 비록 피해는 적었으나 도쿄가 공습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비난을 받는 터라 아에 문제가 된 미 항모세력을 격파하는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사실 둘리틀 공습의 발상 자체가 폭격기를 항모에 실어 출격하여 폭격한다는 참 무모한 게획이기도 했고 일본측이 받은 피해는 미미했지만 그동안 공격받은바 없는 황도가 공격당했다는 심리적 타격을 입히기에는 충분했지요.
1942년 6월 4일~6월 7일 사이 벌어진 이 해전에서 일본은 항모 4척, 순양함 1척 격침에 항공기 322대 격추및 3500명의 전사자를, 미군은 항모1척, 구축한 1척, 147대 격추, 307명 전사의 손실을 입었습니다만 이 와중에 가장 큰 변수는 요크타운이었습니다.
이전 5월에 있던 산호해 해전에서 크게 피격을 입은 항모 요크타운은 적어도 3개월의 수리기간이 필요하다는 진단에도 불구하고 동력과 엘리베이터가 온전한 덕분에 3일간의 응급수리를 받고 기술진을 동승한체 투입되었습니다. 일본측은 요크타운이 산호해 해전에서 크게 피격입은터라 있을거라곤 생각도 못한데다, 요크타운이 전투중 피격을 당하자, 당연히 침몰한줄 알고 배재했으나 기술진이 악착같이 달려들어 다시 복구하여 버티는등 눈물겨운 사투를 벌이는 끝에 침몰을 면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측은 애초에 미 항모수를 2척으로 착각한 데다 요크타운을 격침했다고 판단했으니 미 해군 항모는 한척만 남았다 판단하고는 마지막 남은 항모 1척으로 결단을 내려 했지요.(하지만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은 멀쩡함.)
결국 더이상은 전투 불능이라는 판정에 퇴함조치가 내려지긴 하였으나 당시 항모가 한척이라도 아쉬운 미 해군측으로써는 6월 6일 요크타운을 인양하기로 결정하여 인양을 시작하였으나 하필 뒤를 쫓아온 일본 잠수함의 공격으로 인해 6월 7일 격침당하고 맙니다.
영웅적인 활약을 한 함정으로써는 아쉬은 최후였습니다. 만일 종전까지 살아남았다면 박물관등으로 남아있지 않았을까 생각은 합니다만.
PS: 일본의 어그로를 끈 둘리틀 공습 당시 소이탄에 대한 대응으로 모래 주머니등을 붙는 걸로 불을 끄면 되었고 그로 인해 일본내에서는 민간인들에게 폭격 관련 대응법등으로 저런 소화방법을 교육시키곤 했지만, 45년 석기시대 매니아 커티스 르 메이가 주도한 도쿄대공습에서는 전혀 소용이 없었습니다.
PS2: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다룬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엑스트라들은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당시 엑스트라로 동원된 아일랜드군으로써 이때 호흡 맞춘 750명이 참가했습니다.

















덧글
3. 대사님의 미드웨이전 시리즈를 읽어보면, 우리가 아는 것처럼 미드웨이전이 "결정적인"
전투는 아니었다는 평가를 내리고 계시죠. 미드웨이에서 일본이 이겼다고 해도 하와이 점
령은 불가능했고, 뉴기니와 호주로 진출했어도 결국 미국의 막강한 공업력에 밀려서 패배
했을 거라는 겁니다... 실제 일본의 상륙전 능력만 봐도... 흠.
PS: 무자비하게 퍼붓는 소이탄들을 무슨 재주로 끄겠습니까. 그저 살아남아야 할 뿐....
3. 결정적이기 보다는 전환점이라고는 할수 있지요. 물론 저 이후에도 아직은 일본 해군 세력이 충분히 남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전환점을 무시하기에는 곤란하고 말입니다.
PS: 그때야 소이탄의 양이 적었고 작다보니 모래를 부어서 끌수야 있었지만 45년 도쿄대공습때는...(...)
3. 셔먼님의 댓글에 나온 것 처럼 미드웨이 해전이 전쟁에서 상당히 중요한 포인트이긴 하지만 확실한 '전환점'이라고 보기엔 약간 부족하죠. 연합군이 태평양 전역에서 확실한 승기를 잡은 시점을 꼽는다면 후보로는 과달카날 해전과 필리핀 해전(신나는 칠면조 사냥)이 있기는 한데...어느 쪽이 더 어울릴까요?
ps: 그리고 폭격에 무사했던 어느 두 도시는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각각..(이하 생략)
3. 사실 전환점을 어떻게 보느냐는 사람마다 갈리고 그 정의도 제각각이더군요. 하여간 저 미드웨이 해전 이후로도 해상전력은 미국이 밀리던 시점이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미 항공모함들을 제거한다는 원래 목적에는 실패하고 자신들 항모 4척이나 날려버리고 귀중한 에이스들 여럿을 날려버렸으니 이후 과정에서 이게 미칠 영향이 슬슬 드러나게 되었죠.
아, 확실한 승기를 잡는 시점이라면 과달카날 전투로 잡아야 겠습니다. 필리핀 해전은 인증샷 찍는 그런 단계라고 봐야겠죠.